배구이야기가 대기획으로 준비한 이번 시간에서는 오늘(21일) 남자 국가대표 센터 故 김병선
30주기를 맞이하여 아직도 정신적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故 김병선 선수의 유가족이
대한배구협회를 상대로 배구선수에 대한 과로사 대책을 제기하고 있는 이유를 먼저 알아보고
이번 대기획에서 배구선수 故 김병선 30주기를 맞이하여 국내의 모든 배구전문가들이
대한배구협회를 상대로 "배구선수의 무리한 국내·외 출장 경기로 인해 국가대표 배구선수가
과로사로 급사하는 이런 상황이 재발되면 안된다"라고 대한배구협회를 비난하자마자 과로사
대책을 제기해야 하는 이유를 배구이야기의 대기획에서 가장 먼저 살펴봅니다.
배구선수 故 김병선은 지난 1973년 1월3일 고향인 부산광역시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가족으로 홀어머니와 큰누나, 작은누나를 가족으로 두고 있었습니다.
남자 국가대표 센터로 타점 높은 속공공격은 물론 블로킹, 수비에도 능한 센터 포지션의
배구선수로 2m의 큰 키를 갖춘 배구선수 故 김병선은 신장 200cm, 체중 90kg의 큰 신장을
이용하여 A퀵, B퀵, C퀵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서전트점프 70cm, 스파이크 높이 338cm,
블로킹 높이 335cm의 높은 타점으로 상대 팀 공격수의 공격을 차단하는 블로킹 높이까지
갖출 정도로 대통령배배구대회 시절 성균관대학교 남자배구단에서 센터로 활약했습니다.
홀어머니와 누나 2명을 가족으로 두고 있는 故 김병선은 지난 1991년에 종료된
대통령배배구대회에서 대학부문 신인상을 차지하여 대학배구의 명가 성균관대학교
남자배구단에서 활약하게 됩니다. 故 김병선은 지난 1991년 성균관대학교 1학년 때
열여덟의 어린 나이에 국가대표로 발탁하여 월드리그 국제남자배구대회와 아시아 남자배구
선수권대회에서 부동의 센터로 활약하고 1991년에 종료된 아시아 남자배구 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이 풀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일본에게 세트스코어 2대 3으로 내주자마자 준우승에
그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1991년 하반기에 일본에서 열린 FIVB 월드컵 남자배구 대회에서
한국 남자배구가 월드컵 남자배구 대회 최초로 역대 최고 성적인 5위를 기록하는 국제대회
최고 성적을 달성하게 됩니다. 故 김병선은 지난 1991년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열린 FIVB
세계청소년남자배구선수권대회에서 대한민국 청소년 남자배구대표팀이 결승 토너먼트 8강에
진출하여 6위의 최고 성적을 달성하는 성과를 이루게 됩니다.
1992년 월드리그 국제남자배구대회에 출전했던 故 김병선은 지난 1992년 여름 스페인의 대도시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92바르셀로나올림픽 남자배구 경기에서 주전 센터로 맹활약했으며,
92바르셀로나올림픽 남자배구 경기에서 대한민국 남자배구대표팀이 8강 토너먼트에 진출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맞이하게 됩니다. 1993년 월드리그 국제남자배구대회에 출전한 故 김병선은
지난 1993년 7월 미국의 대도시 버팔로에서 열린 하계 유니버시아드 올림픽 남자배구 경기에서
대한민국 남자배구대표팀이 결승진출에 실패하여 동메달 수상에 그쳤지만 故 김병선은 지난
1993년 가을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 남자배구 선수권대회에서 대한민국 남자배구대표팀의 역대
두번째 우승에 일조하여 1993년 가을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 남자배구 선수권대회에서 베스트
블로커상을 차지하게 됩니다. 1993년 가을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 남자배구 선수권대회에서 역대
두번째 우승을 달성한 대한민국 남자배구대표팀은 이를 계기로 국제배구연맹(FIVB)이 1993년
하반기에 최초로 개최하는 월드그랜드챔피언스컵 남자배구 본선에 출전하게 됩니다.
1993년 하반기에 최초로 개최된 FIVB 월드그랜드챔피언스컵 남자배구 경기는 일본에서 개최되는
국제배구 무대로 한국 남자배구가 처음으로 출전하는 국제대회이자 월드그랜드챔피언스컵
남자배구 경기의 개최국 일본이 출전하는 국제배구 대회로 지금까지 일본에서 계속 개최되고
있었습니다. 故 김병선은 지난 1993년 하반기에 일본에서 열린 FIVB 월드그랜드챔피언스컵
남자배구 경기에서 대한민국 남자배구대표팀의 주전 센터로 활약하게 되고 일본에서 최초로
개최된 FIVB 월드그랜드챔피언스컵 남자배구 경기에 처음 출전한 대한민국 남자배구대표팀은
1993년 FIVB 월드그랜드챔피언스컵 남자배구 경기에서 6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故 김병선은 지난
1993년 봄에 종료된 대통령배배구대회에서 성균관대학교 선수 시절 베스트6에 들었고, 1994년 봄에
종료된 대통령배배구대회와 1994년 월드리그 국제남자배구대회에서 대한민국 남자배구대표팀의
센터로 활약하게 됩니다. 故 김병선은 성균관대학교 4학년 재학 시절 1994년 가을 그리스에서 열린
세계남자배구선수권대회에서 207cm의 최장신 센터 제희경과 195cm의 장신 센터 박종찬과 함께
센터로 나서 대한민국 남자배구대표팀이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하여 8강진입의 대기록을 달성하는
큰 공헌을 이루게 됩니다.
그렇지만 故 김병선은 지난 1994년 10월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하계 아시안게임 남자배구
준결승전 경기에서 대한민국 남자배구대표팀이 나카가이치의 공격을 견제하는 데 실패하여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의 개최국 일본에 세트스코어 0대 3으로 완패하면서 결승진출에 실패하고
결국 이 대회에서 동메달 수상에 그치게 됩니다. 성균관대학교 졸업반이 된 국가대표 센터
故 김병선은 지난 1994년 12월 편도선염과 피부염, 빈혈에 시달렸지만 1994년 12월부터
대한배구협회가 본격적으로 주최하는 한국배구슈퍼리그가 처음으로 개막을 시작하면서
故 김병선은 성균관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현대자동차써비스에 입단하여 2억원의 거액으로
계약을 맺고 현대자동차써비스 남자배구단에서 주전 센터로 활약하게 됩니다.
1994년 12월부터 처음으로 개막을 시작한 한국배구슈퍼리그 무대에서 故 김병선은
현대자동차써비스 남자배구단의 주전 센터로 활약하고 라이트공격수로 과감하게 변신하면서
블로킹, 속공은 물론 A퀵, B퀵, C퀵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한국배구슈퍼리그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합니다. 한국배구슈퍼리그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았던
故 김병선은 한국배구슈퍼리그 경기가 진행되고 있는 1995년 2월 중순에 흉부통증을 호소해
심한 운동을 자제해 왔습니다. 심한 운동을 자제하고 있었던 故 김병선은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있는 현대자동차써비스 남자배구단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가슴 검진을 위해 용산에 있는
금강병원에 들렸고 금강병원 의사로부터 "서울의 가장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라"는 지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1995년 2월21일, 故 김병선은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있는 현대자동차써비스
남자배구단 숙소에서 일어나 물을 마시고 옷을 갈아입고 용산에 있는 현대자동차써비스 남자배구단
숙소를 나와 가슴 검진을 위해 서울의 가장 큰 병원인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있는 서울아산병원으로
향하던 도중 갑자기 쓰러져 용산에 있는 중앙대용산병원으로 이송되고 있는 과정에서 故 김병선은
심장 대동맥 파열로 인한 마판씨 증후군으로 급사하게 됩니다.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故 김병선의
빈소는 용산에 있는 중앙대용산병원에 마련되었고, 중앙대용산병원에 마련된 故 김병선 선수의
빈소는 성균관대학교 친구들이 빈소를 지켰습니다.
배구 국가대표 센터 故 김병선 선수가 심장 대동맥 파열로 인한 마판씨 증후군으로 급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故 김병선의 어머니와 故 김병선의 큰누나, 작은누나는 부산에서 올라와 중앙대용산병원에 마련된
故 김병선 선수 빈소에서 크게 오열했으며, 막내 아들을 잃은 故 김병선 선수의 어머니는 "아들아, 아까운
내 아들이 쓰러지지 않길 바랬는데 이렇게 가버리면 나와 두 딸은 어떡하라고"라며 오열했고, 故 김병선
선수의 큰누나, 작은누나는 "막내 남동생, 이렇게 가버리면 우린 어떻게 되는거야"라며 크게 오열했습니다.
故 김병선 선수의 빈소를 찾은 현대자동차써비스 남자배구단의 강만수 감독은 중앙대용산병원에 마련된
故 김병선 선수 빈소에서 오열했고, 남자 국가대표 센터 故 김병선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장신 선수들에게
'마판씨 증후군'의 주의령이 내려졌습니다. 월드리그 국제남자배구대회와 월드컵, 92바르셀로나올림픽,
93월드그랜드챔피언스컵, 아시아 남자배구 선수권대회, 세계선수권대회, 아시안게임을 비롯한 주요
국제무대에서 맹활약한 故 김병선은 블로킹, 속공은 물론 수비에도 능한 유망주였으며, 국제무대에서
맹활약했던 대선수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움은 개인적인 불행을 넘어 한국 배구계의 큰 손실로
이어졌습니다. 故 김병선이 심장 대동맥 파열로 인한 마판씨 증후군으로 갑작스럽게 급사하면서
사랑하는 그의 가족들과 팬들, 동료들 곁을 떠났고, 심장 대동맥 파열로 인한 마판씨 증후군으로
급사한 배구 국가대표 센터 故 김병선은 고인이 된 이후 유족으로 홀어머니와 누나 2명을 가족으로 두고
있었습니다. 故 김병선을 잃은 현대자동차써비스 선수들은 검은 리본을 달고 경기를 치르게 되었고,
1995년 2월 성균관대학교 졸업식은 故 김병선 선수의 장례식과 발인으로 장례를 치르면서 고인이 된
故 김병선 선수의 장지는 그의 고향인 부산광역시의 어느 묘지에 안장됐습니다.
한국배구슈퍼리그 경기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故 김병선 선수의 어머니와 故 김병선 선수의 큰누나,
작은누나는 대한배구협회를 상대로 배구선수에 대한 과로사 대책을 강력하게 제기했으며, 결국
한국배구슈퍼리그를 운영하고 있는 대한배구협회는 故 김병선 선수의 유가족이 강력하게 요구하는
배구선수에 대한 과로사 대책을 제기한 내용을 듣고 더 이상의 큰 불행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배구선수에 대한 과로사 대책을 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故 김병선을 잃은 현대자동차써비스 남자배구단은 1995년 3월에 종료된 한국배구슈퍼리그 남자부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하여 남자부 챔피언결정전 경기에서 LG화재 남자배구단을 3전 전승으로 완파하고
처음으로 한국배구슈퍼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故 김병선을 잃은 현대자동차써비스의 선수들은
故 김병선과 함께하지 못했던 마음 아픈 우승컵을 안아야만 했습니다. 현대자동차써비스 선수들이
처음으로 故 김병선과 함께하지 못했던 슬픔의 우승컵을 안게 되는 순간 현대자동차써비스의 선수들은
故 김병선과 함께하지 못했던 슬픔의 눈물을 흘려야만 했습니다.
30년이 지나고 오늘(21일) 배구 국가대표 센터 故 김병선 30주기를 맞이했습니다.
故 김병선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한 한국 배구계의 큰 불행이 더 이상 일어나면 안됩니다.
이번 故 김병선 30주기를 계기로 대한배구협회는 배구선수의 무리한 국내·외 출장경기로 인한 과로사로
인해 더 이상의 불행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만큼 대한배구협회가 배구팬들에게 욕을 많이 먹어야
하는 동안 대한배구협회가 배구선수에 대한 과로사 대책 문제를 먼저 조속히 해결할 것을 당부합니다.
배구이야기가 대기획으로 준비한 이번 시간은 여기까지만 마무리하겠습니다.
故 김병선 30주기, 정신적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그의 유가족이 대한배구협회를 상대로
배구선수에 대한 과로사 대책을 제기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아시는 네티즌 여러분들이 있으면 댓글
많이 달아주시길 부탁드리며, 누리꾼 여러분들의 좋은 의견을 기다리겠습니다.